욕망하는 냉장고

 KBS <과학카페> 냉장고 제작팀 지음

애플북스


'냉장고'를 소재로 과잉생산 과잉소비사회부터 로컬푸드까지 다양하게 돌아볼 수 있었던 흥미로운 책

방송된 내용을 재구성한 책이라  분량이 넘치게 많거나 엄청 깊게 들어가지 않지만

요즘 관심사와 많이 겹치는 분야이기에 흥미있게 보았다. 



Posted by 홀씨
,

30p.

우리에게는 국적이란 것이 위에 입은 외투와 같은 의미밖에 지니지 아니했다. 편리상 바꿔입은 옷에 속살까지 변할 수야 없지 않은다. 그것은 사람 나름이다. 국내에 있어도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든 관심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외국사람과 다를 바 없으며, 외국국적으로 바꿔도 일심정신 자신의 조국만 생각하는 사람은 백년을 외국서 외국국적을 가지고 살아도 애국적인 조국의 아들딸이다. 



37p.

불과 3년전에 한국서 세 번이나 사형구형을 받고 생사를 헤메며 고문에 못 이겨 무거운 재떨이로 자신의 머리를 찍어 죽기를 원했던 사람, 그는 예술을 존경할 줄 아는 독일 관중들의 열광에 눈물겨웠다. 

"윤이상씨, 당신이 그때 한국에서 죽었더라면 세계의 음악역사는 얼마나 손해를 봤으며 가난했겠느냐"는 말을 여러번 들으며 우리는 살아왔다. 한 예술가의 성공을 위해서 그의 조국이 뒷받침해서 키워준다. 그러나 그의 조국은 옹졸했다. 



44p.

1974년 8월 15일 광복절을 계기로 우리는 일본 토오꾜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우리가 당한 납치와 우리를 위하여 많은 양심있는 사람들이 독일정부를 움직여 강력히 대응한 끝에 우리가 구출되어 돌아온 과정을 얘기하였다. 그리고 남편은 끝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국의 민주주의의 번영을 위하여, 예술가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으나 이번 사건에 관련해서 서독이 얼마나 강력한 민주주의에 의거한 정치를 시행하고 있는가를 알았다. 비록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한 나라의 정부는 그의 인권을 끝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김대중사건도 민주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며 김대중씨 자신의 의사가 실현될 것을 희망한다"

남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적극적으로 조국의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다. 



48p.

그의 국제적인 예술가로서의 명성과 동베를린사건의 경력은 그 자체가 벌써 정치성을 띠고 있으며 운동의 선봉에 서게 되어 있었다. 



51p.

만약 내가 유럽에 살고 있지 않았고, 그리고 유럽에 많은 친구들을 가지고있지 않았다면, 또 내가 예술가가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박정권에 의해 죽음을 당했을 것입니다.

...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삼엄한 감옥에서 죽음에 직면하면서, 꼭 나와 같이 묶이어서 사형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젊은 청년들을 나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청년들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다만 분단비극의 산물이었습니다. 한국의 암흑상태를 구하기 위하여, 정의로운 길을 걸었다 하여 그네들은 잡히어 참혹하게 고문당하고, 사형언도 받고,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나는 그 청년들이 웃으며 나에게 말한 그 다음날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때때로 보았습니다. 

... (52p.)

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이름도 없고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 애국자들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사형대의 이슬로 떠나갑니다. 그런 사람의 소리로서, 여러분에게 나의 진정을 호소하고 싶습니다. 



82p.

예술은 진실 속에서 생겨나며, 진실한 양심에서 생겨나는 예술만이 창조적이며 남이 모방하지 못한다. 또한 시대의 정신을 간파하고 그것을 옹호해야 한다. 한 사람의 예술가 앞에 불의와 거짓이 나타난다면 그 예술가는 먼저 그것을 극복해나가야 예술같은 예술을 창조할 수 있다. 정치라는 이름 앞에 폭력과 불의가 행세한다면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예술가는 자신의 생명력을 보존하기 위해서 그것과 싸워야 한다. 예술가라면 처음부터 예민한 감성을 가지고 정의감에 불타야 한다. 



114p.

민족의 재간둥이 윤이상 선생



126p.

여러분이 여러분의 음악을 표현함에 있어서 기술이 없어서는 자신의 예쑬을 마음먹을 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나와 같이 표현할 수 있는 많은 기술을 취득하고 난 뒤 여러분의 음악을 만들면 됩니다. 나는 기술을 익혀 나의 길을 발견하고 나의 길을 열었지만 여러분은 여러분의 길을 열어서 자신의 예술을 표현하면 됩니다.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이념에 맞게 작곡하면 됩니다. 표현할 기술이 없으면 우리나라의 음악은 제자리걸음으로 발전이 없습니다. 



139p.

하루는 남편이 나에게 말했다.

"여보, 38선에서 남북음악제를 열면 얼마나 좋을까."

....

우리가 결혼한 이해 나는 때때로 현실성이 전혀 없이 하늘의 구름을 잡는 것 같은 소리를 여러번 들으며 오늘을 살아왔다. 그러나 그 구름을 잡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들리던 말이 몇달이 지나지 않아 현실화되는 것을 적지않게 보아왔다. 

...

그러나 옆에서 듣는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이 얼마 가지 않아서 실현된다는 것을... 이런 생각이 떠올라 나는 미소를 지었다. 



146p.

"윤형, 윤형이 한국 와서 광주를 방문할 것 같으면 그곳에서 윤형을 이용하여 데모할 움직임이 보이니 광주에는 가지 마십시오"

민족의 대사를 앞에 놓고 광주에서 소요를 일으킬 리 만무하지만 전화장의 이 편지로 남편의 기분은 언짢아졌다.

"광주에서 나를 이용하려 한다고 광주망월동을 참배 안할 수 없으며, 그것이 또한 대의명분이 서는 일이라면 이용당할 수도 있소"



148p.

한국이 한때 수해를 입었을 때 민족간의 도움이라 해서 북에서 많은 쌀을 배에 싣고 인천항에 도착했었다. 망향에 젖어 사는 북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 새벽부터 고향에서 온 배와 쌀을 보려고 인천항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네들은 생전에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산소에, 배급받은 고향의 쌀로 밥을 지어 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151p.

아침에 남편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며 "여보, 이젠 난 아무것도 못하겠소. 숨쉬기가 이렇게 힘이 드는데 뭣을 하겠소"하며 괴로워했다. 남편이 일어나기 전에 한국서 소식을 받은 나는 "여보! 정신차려요. 한국 통일원에서 북에 갈 음악인들에게 정식으로 허락이 내렸대요"하며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통일의 길에 조금이라도 무엇인가를 움직이려는 희망은 그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렇게 힘주어 말했다. 금시 꺼질 것 같던 그의 눈은 순간 빛을 발하며 기쁜 표정이 얼굴에 스쳤다. 

나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의 몸을 추스스려고 애썼다. 나의 힘을 보태주듯 나는 그를 안고 쓰다듬었다. 남편은 생의 밑바닥에 가라앉으려던 힘을 다시 내어 일어섰다. 불사조와 같은 정신력으로...



153p.

결국 남도창의 오정숙 여사가 "이번 축전에 부를 곡입니다. 윤이상 선생님이 특별히 주문한 곡이나 오늘 저녁에 부르겠습니다"하며 낭랑히 육자배기를 불러 그 진수를 보여주었다. 그것을 들으며 내 나라 전국토를 한자리에 펼쳐놓을 것 같은 감회로 남편과 나는 쉴 사이 없이 눈물을 흘렸다. 외로운 사람들에게는 고향의 노랫가락 하나에도 마음이 극도로 흔들리는 향수가 두텁게 깔려있는 것이다.



157p.

이번 범민족 통일음악회에서 특히 마음을 울린것은 한국에서 유명했던 피아니스트 이인형씨의 남에서 낳은 딸 이방은과 북에서 난 아들 이민섭 오누이가 생후 처음으로 상봉하여 무대에서 협연하기 위하여 손잡고 나오고 퇴장하는 눈물겨운 모습이었다. 



165p.

"꿈이거든 깨지 말고 생시거든 변치 마라"

분단 45년 만에 남에서 동생을 얼사안은 서도창의 김진명옹의 부르짖음이다. 



169p.

나는 마치 경마장에서 달리던 병들고 늙은 말에 비할 수 있소. 그런 나를 끌어내 경마장에 다시 내세우기 위해서 나의 몸을 닦고 기름을 바르고 먹이를 주어 일으켜서 눈에 빛이 나고 힘을 얻어 민족을 등에 업고 일선에서 달리기를 모두 원하고 있소. 혹은 늙고 병든 노병이 이제 갑옷도 투구도 차고있는 칼도 모두 녹이 슬어 있소. 그런데 나를 다시 전선에 내세우기 위해서 갑옷, 투구를 손질하고 칼을 닦아 빛나게 하고 있소. 그리고 나를 쳐다보고 있소."

그리하여 그는 또 힘을 모아 일어서기로 했다. 민족을 위한다면 힘을 다할 때까지...



173p.

작곡가는 비단 예술가일 뿐 아니라 동시에 세계속의 한 인간이다. 나는 결고 그 세계를 무관심하게 관찰할 수 없다. 세상에는 인간적인 고통, 억압, 고난과 부당함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이 내 생각속에 들어온다. 고통이 있고 부당함이 있는 곳에 나는 음악을 통해 더불어 얘기하고자 한다. 



182p.

바닷가에서 자라난 나는 많은 종류의 어부들의 노래를 기억하고 있다. 노를 저어갈 때 부르는 노래, 바다 위에 낚싯대를 띄워놓고 한가히 부르는 노래, 군어를 쫒거나 그물을 당기면서 신이 나게 부르는 율동적인 합창들, 논에 모를 심을 때는 아낙네들이 줄을 지어 부르는 노래가 퍽 인상적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이럴 때면 퍽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어머니는 또 오뉴월에 콩밭을 맬 때에도 우아하고 구슬픈 노래를 불렀다. 때로 기선이 항구에 닿을 때나 떠날 때에는 기적이 슬프게 울렸다. 모두 소리높이도 음색도 다르게...



200p.

"음악은 인류에 공헌하는 것이어야 한다"


207p.

언젠가 나는 한번 민족을 위한, 우리 민족의 가슴에 영원히 안겨주는 곡을 쓰고 싶었다. '광주여 영원히!'와 함께 나는 작곡가로서 우리 민족에게 바치는 나의 절절한 호소와 충정을 표시한 것이다. 


 


'독서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욕망하는 냉장고  (0) 2017.02.14
내 남편 윤이상 (상)  (0) 2016.01.04
윤이상 루이제 린저의 대화 : 윤이상, 상처 입은 용  (0) 2015.11.24
나는 평양의 모니카입니다.   (0) 2015.11.18
개성공단 사람들  (0) 2015.09.21
Posted by 홀씨
,


부인인 이수자여사가 쓴 윤이상의 생애에 대한 책.

상권에는 어린시절, 이수자여사와의 만남, 유학생활, 동백림(동베를린)사건 까지 다루고 있다. 

윤이상에 대해 다룬 다른책들보다 내용이 풍부하고, 윤이상이 직접 쓴 글들도 첨부되어 있어 가장 자세한 듯 하다. 내용이 '상처입은 용'과 많이 겹치고, 때로는 인용도 되어 있다.

연애부분이 엄청나게 상세하게 나와 있어 두근두근 흥미롭다ㅋㅋ 

윤이상은 엄청난 닭살커플이었던 것이다!!!!

또 사랑, 결혼, 삶, 인생 등에 대한 시각들을 엿볼 수 있다. 


-------------------


48p. 

결혼 전에는 결혼의 조건이 따르는 법이다. 집안, 학벌, 건강, 재산, 형제, 직업 등 많이도 조건들을 헤아린다. 사람보다는 이 조건이 적당한가를 보고 뒤에 사람을 본다. 그의 경우는 조건이라고는 손꼽아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결혼 뒤에는 조건이 다 사라지고 사람이 앞에 나타난다. 그의 진실한 인간성, 인품, 그리고 생김새를 대한 우리 식구들은 모두 그를 좋아했다.


56p.

학교는 문을 닫았고 그나마 수입이 없어지자 할 수 없이 내가 가지고 있던 물건 중에서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결혼 반지며 시집올 때 가지고 온 다이아반지며 모두 다 파는 것을 보며 남편은 몹시 마음이 아팠던 것 같다. 보다보다 못한 그도 일제 때 쫒겨다니면서도 자신의 반려처럼 안고 다니던 첼로를 팔아버렸다. 그때 나는 아직도 소견이 없어 파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후에 생각하니 그것을 팔지 않아도 죽지는 않았을 텐데, 후회스러웠고 남편에게 미안하기만 했다.


59p.

누님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뒤에 과부가 되었다. 얼마 안되는 재산이나마 한푼도 유산으로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때 까지는 행복했다. 그러나 6.25의 비극은 남해의 작은 항구에까지 들이닥폈다. 인민군이 남하하기 사흘 전, 학생써클에 가담했던 많은 학생들이 남한당국에 의해 불끈 묶인 채 어디론가 끌려갔다. 이 철없는 아이들은 모조리 총을 맞아 바다에 던져졌는데 거기에는 중학생이던 누님의 아들딸이 섞여있었다. 이로부터 누님은 실신상태로 몇해 동안을 살았다. 


60p. 

진통이 조금 심해지기 시작했다. 언제 아이가 세상에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온돌방은 차가웠고 거기다 정전마저 되었다. 촛불이나 기름불을 켜려 해도 그것을 살 푼돈마저 없었다. 남편이 이웃의 친구에게 구원을 청하러 갔으나 마침 친구가 집에 없어 빈손으로 돌아왔다. 나는 겁도 나고 슬프기도 하여 눈물이 났다. 빈손으로 돌아온 남편은 깜깜한 방안에서 나를 깊이 끌어안으며 말했다. 

"여보, 울지 말아요. 당신이 우리 아기 낳으면 내가 탯줄 끊고, 미역국이며 밥이며 부족한 것 없이 다 할테니 조금도 걱정 말아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려는 이 순간 어두운 방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고 포옹한 채 움직이지 아니하녔다. 너와 내가 없는 깊이 밀착된 신뢰와 사랑은 가난이 더이상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서러움을 넘어서 성스럽기까지 하였다. 우리는 평생 이때를 잊지 아니하였으며 그것이 또한 우리를 죽을때까지 이어주는 큰 동력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날이 샜으나 아기는 아직 소식이 없었다. 점심때가 지나고 저녁이 될 무렵, 어머니와 작은이모가 산파를 데리고 들어왔다. 

"왜 이리 어둡게 하고 있느냐?"

"......."

어머니로 인해 집은 다시 밝고 따뜻해졌으며 아기와 산모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마련되었다. 이리하여 생기가 넘치고 웃음이 가득한 밝은 집에서 첫아기가 태어났다. 


65p.

이 세상에 노력 안하고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신혼때의 사랑이 퇴색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남편은 자신이 호흡하는 사회를 항상 아내에게 갖다 줘야 하고, 아내는 받아서 소화하고 이해하고 독서하며, 남편이 숨쉬는 사회를 같이 호흡하고 겪고 같이 나가야 한다. 대화는 항상 계속되어야 한다.


73p.

예술은 사상의 누각이 아니다. 전통의 미에 토대를 두고 현실에 철하고 또한 미래에 항구성을 띠지 않으면 안된다.


87p.

약 400년전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가 충청,전라.경상 삼도수군통제사의 본영으로 사용된 세병관의 건축때 건축가로 참가한 그의 조상의 이름이 현판에 기록되어 있음을 그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가르쳤다. 

1866년 유럽의 배가 해군기지인 통영앞바다에 입항하였을 때, 조선은 외국에 대해 쇄국정책을 쓰고 있었다. 국왕은 우리나라를 위해서 이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여 두 사람의 고급 사관에게 명하여 배에 구멍을 뚫어 침몰시키라 하였는데 임무를 받은 장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그의 증조부였다. 임무를 받은 증조할아버지는 날이 어두워졌을 때 몇십명의 사병을 데리고 바다에 잠입하여 적선 밑에 구멍을 뚫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89p.

윤이상의 외할아버지는 정의감이 강하고 의용에 찬 농민이었다. 부도덕한 관리들의 행패를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외할아버지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솔선하여 앞에 나서서 싸웠다. 그러나 농민운동은 끝내 성공하지 못했고 감옥에 갇힌 외할아버지는 모진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폐인이 되고 말았다.


101p.

<명창 이화중선>

이때 청중들의 노래에 따라 움직이는 광경이 장관이었다. 노래가 흐르는 동안 일체 숨을 죽이고 있다가 마디마디 미묘한 선율이 굽이쳐 넘어갈 적마다 수천의 청중들이 일제히 '좋다'하며 한숨섞인 '탄식'을 했던 것이다. 그 '좋다'소리가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멍석위에 깨알처럼 낮아있던 백의의 청중들은 노래의 억양에 따라 일제히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하며 상체를 가볍게 움직였다. 이것은 마치 봄날의 보리밭에 녹색의 보리들이 엷은 바람 따라 온통 물결을 이루는 것 같았다. 이렇게 이 명창과 무수한 청중이 완전히 한마음이 되어 그칠줄을 모르는 절창에 밤은 깊어만 갔다.


102p.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가슴에 와닿는 것이 남도창이다. 방랑생활을 하는 외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1990년에 있은 남북통일음악제때 남북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육성으로 남도창을 들은 적이 있다. 남편과 나는 감격때문에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감정이 풍부한 남도창의 진미를 북의 동포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이 조그마한 나라에 어찌 남도창과 서도창이 이다지도 다를까 싶었으나 그 진가가 소중한 것은 남도 북도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남편은 항상 남쪽사람은 예술적인 감정이 풍부한 온화한 국민성을, 북은 활달하고 용맹한 투쟁적인 국민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남북통일음악제 때의 그 감격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남북이 아무 구애 없이 왕래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까지는...


103p.

[견우와 직녀 이야기] 또한 그 실례이다. 베를 짜는 직녀와 밭을 가는 견우의 만남도 일년에 한번씩은 허락되거늘, 아직도 분단된 조국에서 반백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건만 일년에 한번씩도 만나지 못하는 민족의 비운을 한탄하여 남편은 오보에와 하프, 소관현악을 위한 2중협주곡을 작곡했다. 경우와 직녀, 남한과 북한을 각각 오보에와 하프로 노래한 이 곡은 1977년 9월 베를린 축제주간에 베를린 필의 연주로 초연되었는데, 오보에는 하인츠 홀리거가, 하프는 그의 아내인 우르줄라 홀리거가 맡았다. 


124p. 

나는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극복할 것이며 나에게 주어진 이 3년의 배움을 통해 결단코 내가 자랄때 황무지 같은 우리나라의 음악계에서 하던 그 고생을 나의 후배들에게는 시키지 않으리라고 조국의 하늘을 두고 맹세하였소. 


125p.

떠나고 보니 잊어버린 게 있어 - 뭔고 하면 - 내 땅의 흙 한줌과 당신의 머리칼을 다음 소포에 부쳐주도록 하오. 


152p.

한국인들은 유럽에서 조국에 대한 자존심을 세울 길이 없다가 한국 작곡가의 작품이 그많은 대중에게 감동을 주는 것을 보고 큰 자부심을 느꼈나 보오. 그들이 같은 동포로서의 즐거움에 넘쳐흐르는 걸 보며 나의 마음은 한없이 즐거웠소. 


157p. 

그리고 병고로 세월을 허비했지만 나에게는 음악이란 꽃이 언제든 한번은 피게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믿소. 꽃의 종자는 한번 땅에 떨어지면 아무리 가물거나 비바람이 펴도 또는 발에 짓밟혀도 늦가을에나마 끝내 한번은 피고야 마는 법이오. 


185p.

19일, 라디오에서 그 사건 발생의 보도를 듣고 난 직후 나는 서울의 거리 거리에서 피에 붇혀 뒹구는 청년학생들을 생각하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터져나오는 울분의 홍수를 생각하고, 총탄 앞에 수없이 쓰러지는 귀한 한국의 아들딸들을 생각하며 라디오 앞에서 펑펑 울었소.

조국의 명줄기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청년들의가슴속에 뜨거운 정열이 남아있는 것을 생각하지, 그저 고맙고, 그들에게 미안하고, 또 흘린 피가 너무 아까워서 나는 오랫동안 소리내어 울었소. 


224p. 

베를린은 그때까지도 서와 동의 사이에 경계가 없었으며, 동베를린 쪽이 물가가 싸기 때문에 서베를린 사는 사람들이 전차타고 동베를린에 가서 물건, 식료품 등을 사온다는 얘기도 들었다. 우리나라는 휴전선이 절대 경계선인데 독일은 어찌 동.서독의 경계선이 없고 단속하는 사람도 없이 왕래할 수 있는지 부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276p.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고 아침에 딸이 입원하고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나도 모르게 자꾸 슬프고 눈물이 났다.

...

딸은 그때 내 모습을 보고 "엄마는 여간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데 왜 저리 우실까"하고 생각했단다. 그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도 모르면서...

...

돌이켜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나는 어떤 어마어마한 운명이 우리 앞에 다가옴을 예상했던 것 같아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신비스럽게 느껴진다.








'독서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욕망하는 냉장고  (0) 2017.02.14
내 남편 윤이상 (하)  (0) 2016.01.04
윤이상 루이제 린저의 대화 : 윤이상, 상처 입은 용  (0) 2015.11.24
나는 평양의 모니카입니다.   (0) 2015.11.18
개성공단 사람들  (0) 2015.09.21
Posted by 홀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