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인 이수자여사가 쓴 윤이상의 생애에 대한 책.
상권에는 어린시절, 이수자여사와의 만남, 유학생활, 동백림(동베를린)사건 까지 다루고 있다.
윤이상에 대해 다룬 다른책들보다 내용이 풍부하고, 윤이상이 직접 쓴 글들도 첨부되어 있어 가장 자세한 듯 하다. 내용이 '상처입은 용'과 많이 겹치고, 때로는 인용도 되어 있다.
연애부분이 엄청나게 상세하게 나와 있어 두근두근 흥미롭다ㅋㅋ
윤이상은 엄청난 닭살커플이었던 것이다!!!!
또 사랑, 결혼, 삶, 인생 등에 대한 시각들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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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p.
결혼 전에는 결혼의 조건이 따르는 법이다. 집안, 학벌, 건강, 재산, 형제, 직업 등 많이도 조건들을 헤아린다. 사람보다는 이 조건이 적당한가를 보고 뒤에 사람을 본다. 그의 경우는 조건이라고는 손꼽아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결혼 뒤에는 조건이 다 사라지고 사람이 앞에 나타난다. 그의 진실한 인간성, 인품, 그리고 생김새를 대한 우리 식구들은 모두 그를 좋아했다.
56p.
학교는 문을 닫았고 그나마 수입이 없어지자 할 수 없이 내가 가지고 있던 물건 중에서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결혼 반지며 시집올 때 가지고 온 다이아반지며 모두 다 파는 것을 보며 남편은 몹시 마음이 아팠던 것 같다. 보다보다 못한 그도 일제 때 쫒겨다니면서도 자신의 반려처럼 안고 다니던 첼로를 팔아버렸다. 그때 나는 아직도 소견이 없어 파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후에 생각하니 그것을 팔지 않아도 죽지는 않았을 텐데, 후회스러웠고 남편에게 미안하기만 했다.
59p.
누님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뒤에 과부가 되었다. 얼마 안되는 재산이나마 한푼도 유산으로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때 까지는 행복했다. 그러나 6.25의 비극은 남해의 작은 항구에까지 들이닥폈다. 인민군이 남하하기 사흘 전, 학생써클에 가담했던 많은 학생들이 남한당국에 의해 불끈 묶인 채 어디론가 끌려갔다. 이 철없는 아이들은 모조리 총을 맞아 바다에 던져졌는데 거기에는 중학생이던 누님의 아들딸이 섞여있었다. 이로부터 누님은 실신상태로 몇해 동안을 살았다.
60p.
진통이 조금 심해지기 시작했다. 언제 아이가 세상에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온돌방은 차가웠고 거기다 정전마저 되었다. 촛불이나 기름불을 켜려 해도 그것을 살 푼돈마저 없었다. 남편이 이웃의 친구에게 구원을 청하러 갔으나 마침 친구가 집에 없어 빈손으로 돌아왔다. 나는 겁도 나고 슬프기도 하여 눈물이 났다. 빈손으로 돌아온 남편은 깜깜한 방안에서 나를 깊이 끌어안으며 말했다.
"여보, 울지 말아요. 당신이 우리 아기 낳으면 내가 탯줄 끊고, 미역국이며 밥이며 부족한 것 없이 다 할테니 조금도 걱정 말아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려는 이 순간 어두운 방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고 포옹한 채 움직이지 아니하녔다. 너와 내가 없는 깊이 밀착된 신뢰와 사랑은 가난이 더이상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서러움을 넘어서 성스럽기까지 하였다. 우리는 평생 이때를 잊지 아니하였으며 그것이 또한 우리를 죽을때까지 이어주는 큰 동력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날이 샜으나 아기는 아직 소식이 없었다. 점심때가 지나고 저녁이 될 무렵, 어머니와 작은이모가 산파를 데리고 들어왔다.
"왜 이리 어둡게 하고 있느냐?"
"......."
어머니로 인해 집은 다시 밝고 따뜻해졌으며 아기와 산모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마련되었다. 이리하여 생기가 넘치고 웃음이 가득한 밝은 집에서 첫아기가 태어났다.
65p.
이 세상에 노력 안하고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신혼때의 사랑이 퇴색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남편은 자신이 호흡하는 사회를 항상 아내에게 갖다 줘야 하고, 아내는 받아서 소화하고 이해하고 독서하며, 남편이 숨쉬는 사회를 같이 호흡하고 겪고 같이 나가야 한다. 대화는 항상 계속되어야 한다.
73p.
예술은 사상의 누각이 아니다. 전통의 미에 토대를 두고 현실에 철하고 또한 미래에 항구성을 띠지 않으면 안된다.
87p.
약 400년전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가 충청,전라.경상 삼도수군통제사의 본영으로 사용된 세병관의 건축때 건축가로 참가한 그의 조상의 이름이 현판에 기록되어 있음을 그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가르쳤다.
1866년 유럽의 배가 해군기지인 통영앞바다에 입항하였을 때, 조선은 외국에 대해 쇄국정책을 쓰고 있었다. 국왕은 우리나라를 위해서 이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여 두 사람의 고급 사관에게 명하여 배에 구멍을 뚫어 침몰시키라 하였는데 임무를 받은 장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그의 증조부였다. 임무를 받은 증조할아버지는 날이 어두워졌을 때 몇십명의 사병을 데리고 바다에 잠입하여 적선 밑에 구멍을 뚫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89p.
윤이상의 외할아버지는 정의감이 강하고 의용에 찬 농민이었다. 부도덕한 관리들의 행패를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외할아버지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솔선하여 앞에 나서서 싸웠다. 그러나 농민운동은 끝내 성공하지 못했고 감옥에 갇힌 외할아버지는 모진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폐인이 되고 말았다.
101p.
<명창 이화중선>
이때 청중들의 노래에 따라 움직이는 광경이 장관이었다. 노래가 흐르는 동안 일체 숨을 죽이고 있다가 마디마디 미묘한 선율이 굽이쳐 넘어갈 적마다 수천의 청중들이 일제히 '좋다'하며 한숨섞인 '탄식'을 했던 것이다. 그 '좋다'소리가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멍석위에 깨알처럼 낮아있던 백의의 청중들은 노래의 억양에 따라 일제히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하며 상체를 가볍게 움직였다. 이것은 마치 봄날의 보리밭에 녹색의 보리들이 엷은 바람 따라 온통 물결을 이루는 것 같았다. 이렇게 이 명창과 무수한 청중이 완전히 한마음이 되어 그칠줄을 모르는 절창에 밤은 깊어만 갔다.
102p.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가슴에 와닿는 것이 남도창이다. 방랑생활을 하는 외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1990년에 있은 남북통일음악제때 남북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육성으로 남도창을 들은 적이 있다. 남편과 나는 감격때문에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감정이 풍부한 남도창의 진미를 북의 동포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이 조그마한 나라에 어찌 남도창과 서도창이 이다지도 다를까 싶었으나 그 진가가 소중한 것은 남도 북도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남편은 항상 남쪽사람은 예술적인 감정이 풍부한 온화한 국민성을, 북은 활달하고 용맹한 투쟁적인 국민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남북통일음악제 때의 그 감격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남북이 아무 구애 없이 왕래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까지는...
103p.
[견우와 직녀 이야기] 또한 그 실례이다. 베를 짜는 직녀와 밭을 가는 견우의 만남도 일년에 한번씩은 허락되거늘, 아직도 분단된 조국에서 반백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건만 일년에 한번씩도 만나지 못하는 민족의 비운을 한탄하여 남편은 오보에와 하프, 소관현악을 위한 2중협주곡을 작곡했다. 경우와 직녀, 남한과 북한을 각각 오보에와 하프로 노래한 이 곡은 1977년 9월 베를린 축제주간에 베를린 필의 연주로 초연되었는데, 오보에는 하인츠 홀리거가, 하프는 그의 아내인 우르줄라 홀리거가 맡았다.
124p.
나는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극복할 것이며 나에게 주어진 이 3년의 배움을 통해 결단코 내가 자랄때 황무지 같은 우리나라의 음악계에서 하던 그 고생을 나의 후배들에게는 시키지 않으리라고 조국의 하늘을 두고 맹세하였소.
125p.
떠나고 보니 잊어버린 게 있어 - 뭔고 하면 - 내 땅의 흙 한줌과 당신의 머리칼을 다음 소포에 부쳐주도록 하오.
152p.
한국인들은 유럽에서 조국에 대한 자존심을 세울 길이 없다가 한국 작곡가의 작품이 그많은 대중에게 감동을 주는 것을 보고 큰 자부심을 느꼈나 보오. 그들이 같은 동포로서의 즐거움에 넘쳐흐르는 걸 보며 나의 마음은 한없이 즐거웠소.
157p.
그리고 병고로 세월을 허비했지만 나에게는 음악이란 꽃이 언제든 한번은 피게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믿소. 꽃의 종자는 한번 땅에 떨어지면 아무리 가물거나 비바람이 펴도 또는 발에 짓밟혀도 늦가을에나마 끝내 한번은 피고야 마는 법이오.
185p.
19일, 라디오에서 그 사건 발생의 보도를 듣고 난 직후 나는 서울의 거리 거리에서 피에 붇혀 뒹구는 청년학생들을 생각하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터져나오는 울분의 홍수를 생각하고, 총탄 앞에 수없이 쓰러지는 귀한 한국의 아들딸들을 생각하며 라디오 앞에서 펑펑 울었소.
조국의 명줄기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청년들의가슴속에 뜨거운 정열이 남아있는 것을 생각하지, 그저 고맙고, 그들에게 미안하고, 또 흘린 피가 너무 아까워서 나는 오랫동안 소리내어 울었소.
224p.
베를린은 그때까지도 서와 동의 사이에 경계가 없었으며, 동베를린 쪽이 물가가 싸기 때문에 서베를린 사는 사람들이 전차타고 동베를린에 가서 물건, 식료품 등을 사온다는 얘기도 들었다. 우리나라는 휴전선이 절대 경계선인데 독일은 어찌 동.서독의 경계선이 없고 단속하는 사람도 없이 왕래할 수 있는지 부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276p.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고 아침에 딸이 입원하고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나도 모르게 자꾸 슬프고 눈물이 났다.
...
딸은 그때 내 모습을 보고 "엄마는 여간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데 왜 저리 우실까"하고 생각했단다. 그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도 모르면서...
...
돌이켜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나는 어떤 어마어마한 운명이 우리 앞에 다가옴을 예상했던 것 같아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신비스럽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