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의 생애를 인터뷰형식으로 다룬 책.
어린시절 통영에서 자랄 때의 세세한 감성적인 기억이 무척 인상적이다.
동백림(동베를린)사건으로 고초를 겪을 때의 이야기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윤이상의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와 해설도 자세히 나오는데, 그부분은 패스해가며 주욱 읽어내렸다.
외국어로 된 책을 번역한 것 치고는 놀랄정도로 매끄러운데, 번역자가 윤이상의 제자여서 그런걸까?
서정적인 묘사까지도 살아있어서 읽을 맛이 났다.
19p.
... 어느날 은퇴해 고향으로 돌아가 그저 조용히 바닷가에 앉아 물고기를 낚고 마음속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그것을 써두려고도 하지 않고 위대한 고요함 속에 내 몸을 뉘었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또 나는 그 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내 고향 땅의 온기 속에 말입니다.
25p.
그래도 나는 아버지에 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종종 밤낚시를 하러 바다로 나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배위에 앉아 물고기가 헤엄치는 소리나 다른 어부들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노랫소리는 배에서 배로 이어져 갔습니다. 소위 말하는 남도창이라 불리는 침울한 노래인데, 수면이 그 울림을 멀리까지 전해주었습니다. 바다는 공명판 같았고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습니다. 나에게는 아버지와 함께하지 않은 또 다른 바다에 대한 체험도 있습니다. 밤에 혼자 낚시를 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갔습니다. 몰래 말이죠.
.....
나한테 중요한 것은 물고기를 잡는 게 아니라 거기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혼자서 별이 가득한 하늘 아래 말입니다. 여름에는 하늘에서 수많은 별똥별이 떨여졌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밤 세계가 나에게는 신비한 매력이었습니다. 벼랑까지 가는 도중이나 기어내려갈 때에는 무섭고 불안했지만 거기에 앉으면 불안이 사라지고 정말이지 행복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29p.
봄이 되어 논에 물을 댈 때면 개구리 천지입니다. 매일 밤 개구리 소리가 정말 시끄러웠는데 그게 나에게는 우는 소리가 아니라 예술적으로 구성된 혼성합창처럼 들렸습니다. 한 마리가 울기 시작하면 다른 소리가 거기에 맞춰 화답하고 세 마리째가 가세하면 갑자기 고음, 중음, 저음의 합창이 일제히 시작되고 또 갑자기 모두 침묵합니다. 간격을 두고는 다시 독창이 시작되고 다른 소리가 거기에 화답하고 그리고 다시 합창이 되지요. 밤이 새도록 말입니다. 낮에는 여자들이 밭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여자들은 오래된 민요를 부르는데 어머니도 같이 노래를 부릅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아름다웠습니다.
35p.
원래는 서당에서 하던 축제였고, 일종의 경기였는데 그러면서도 아주 조용했습니다. 아이들이 줄을 맞추어 한 사람 한 사람 등을 듭니다. 큰 아이들은 큰 등을 들고, 작은 아이들은 작은 등을 들고 추수가 끝난 논을 밤새도록 걸어다닙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등이 서서히 꺼지고 마지막에 단 하나가 남을 때 까지 계속해서 걷는겁니다. 빛이 하나 둘 사라져가는 광경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36p.
이런 축제는 우리들에게는 그저 단지 아름답기만 했던 건 아니고, 일제강저기에는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들은 침묵과 인내를 강요받아왔던 민족입니다. 일본인은 우리들을 완전히 일본화하기 위해서 우리의 독자성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이런 축제는 우리들이 민족적인 자각을 잃지 않게 하는 데 중요한 몫을 했습니다. 이런 축제들은 조용하고 강인한 정치적 저항의 상징이고 표현이었습니다.
46p.
아이들은 또한 숨겨진 서고에서 금서를 가지고 나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책이 우리의 민족의식과 독립의지를 강화시켰습니다. 물론 그런 책은 개인의 서고에밖에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마을의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이순신 장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순신을 400년전 사람인데 일본과의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뒀고 그 용감한 행동에 대해 유명한 일화가 많이 전해져옵니다. 그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나중에 기록으로 남겨진 것입니다. 이 민족의 영웅은 우리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우리들은 이순신이 살았던 곳에서 사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 시절에 나는 내 나라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걸 배웠던 겁니다.
61p.
어느 날 확성기가 붙어 있는 복도로 나갔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천황, 그러니까 일본 천황이 항복 조서를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확성기 앞에는 일본인 의사와 간호사들이 울면서 서 있었습니다. 나는 너무 기뻐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병원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신문팔이 소년이 호외를 뿌리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아직그 소식을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내 이름표를 집어 뜯은 뒤 계속 달렸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붙잡고 호나호성을 올리고 시내를 달리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만세-조선만세라고.
그것은 저항운동을 하던 사람들에게는 비밀스런 암호였습니다. 이제는 모두가 친구이고 형제입니다. 해방, 36년만의 해방! 나는 3일 낮, 3일 밤을 시내에 있었고 그리고 지쳐서 병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의사는 놀라서 말랬습니다. "이러면 죽을수도 있어!"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작품 같은 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빨리 폐를 치료하지 않으면 평생 누워있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중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병원을 나왔습니다. 우리 조국을 위해 일하고 싶었고, 재건을 위해 협력하고 싶었습니다.
87p.
나의 음악은 우리나라 한국의 고향땅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성장한 것이고, 내가 서양의 현대적인 작곡기법을 사용했다고는 해도 우리 전통에서 멀어지거나 그것을 버리려 한 것도, 인공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저 그것을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92p.
내가 북한에서 들어가보았던 묘도 그랬습니다. 내부에는 서너개의 방이 있는데 그 중에 왕의 방이었던 곳에서 나는 오랫동안 동경해왔던 벽화를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부가 어두웠거든요. 그러나 그러는 사이 점차 그 어둠 사이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색채가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적, 백, 청, 황의 색채가 마치 지금 막 칠한 것처럼 생생했습니다. 1500년이나 습기찬 땅속 깊이 보존되어왔던 색채는 아주 강렬하고 정말 훌륭했습니다. 그것은 광물로 만들어진 안료였습니다. 묘 안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던 것은 일본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벽화의 가치를 알아보았고 잘 보존했습니다. 그 뒤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미국인이 왔습니다. 아마도 전문가였겠지요. 그들은 안료의 극히 일부를 아주 조심스럽게 긁어내 가지고 갔는데, 아마도 그들은 이 빛나는 안료의 비밀을 조사했던 모양입니다.
153p.
그들은 내가 정말로 꿇어앉을 때가지 나를 밟아 뭉갰습니다. 둘이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난 아주 지쳤어. 오늘은 대체 얼마나 더 오래 해야 하는거지"라고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마누라가 날 기다리고 있어. 집에는 쌀이 떨어졌는데 난 여길 나가지도 못하고..."라고 또 한 남자가 말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이 사람들도 각각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그들은 기계와 같았습니다.
156p.
법에 의하면 죄인은 모두 매일 15분간 감방 밖으로 나가 운동하는 게 허락되어야 했지만, 우리들에게는 5분밖에 주어지지 않았고 그것도 복도를 걸어가는 시간까지 포함해서였기 때문에 마당에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정말 멋졌습니다. 한국의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르렀고, 그 풍경은 신기하게도 나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정말로 그리워하던 하늘이었습니다. 그 짧은 사이에 우리 정치범들은 말을 주고받았고 위로와 정보를 주려고 애썼습니다.
181p.
윤이상씨는 유럽 뿐 아니라 실제로 전세계에서 뛰어난 작곡가로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의 목적은 늘 한국 음악의 우수한 전통을 서양음악의 경향과 결부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일과 인격은 한국문화와 예술을 한국 바깥으로 알리는 귀중한 존재라고 생각됩니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귀국에 대해서 지극히 조금밖에 몰랐을 것입니다.
...
동양과 서양의 중재자로서 그의 역할은 우리들 모두에게 더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한국의 음악 대사로서 그는 둘도 없는 존재입니다.
190p.
신호로 이야기를 나눈 학생은 심문이나 고문을 받고 돌아올때마다 언제나 나에게 신호를 주었습니다. 그는 한 번도 낙심하거나 우울해하지 않고 오히려 웃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터무니없이 용감해서 나에게도 많은 용기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수화로 하루에 다섯시간이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
그는 한국 민중 중에는 아직도 부패하지 않은 사람이 많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 싸울 가치가 있다는 것을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194p.
김일성이 나와 말을 하자 거대한 광장에서 내려다보이는 범위내의 모든 군중이 일제히 울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민중들은 전후 오랫동안 굶주리고가난하고 살 집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김일성이 기둥이 되어, 짧은 사이에 사람들은 이미 굶지도 추위에 떨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집이 세워졌는데 그것도 낡은 오두막이 아니라 정말로 기와를 얹은 집이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김일성은 사실 많은 성과를 올려 지도자의 자격을 증명했고, 또 개인적인 위엄도 보여주었습니다. 민중들은 그 밖의 정치는 알지 못했고, 북한 이외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보고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새로운 생활에 완전히 만족해 버렸습니다.
205p.
이렇게 해서 실제로 다시 음악적인 판타지 안에서 살 수 있게 되자 고통도 절망도 잊고 자유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나는 하늘을 날고 내가 바라는 어디에서도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나는 이 기간 동안 가끔 행복했습니다. 내 총보가 후세에 남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언젠가 상연될 날이 올 거라고는 한 번도 확신한 적이 없습니다. KCIA가 그것을 압수하여 파기해버릴 거라고 거의 단정하고 있었습니다. 나를 작곡이라는 일로 몰입하게 한 것은 작곡이라는 일 자체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유로운 정신을 가두어 둘 수 는 있지만, 그러나 죽일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입니다.
235p.
내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들은 바로는 학생들이 옛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서 상연을 허락받은 레퍼토리 중에는 심청극도 있다고 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은밀하게 다음과 같은 해석도 행해지고 있었다 - 청은 한국 민중의 혼이고, 독재자의 명령에 의해 고문으로 죽는다. 그러나 그녀는 환생과 동시에 늙은 맹인 아버지 즉 독재자도 변화시켜 전 민중을 구해 낸다.
전 민중의 구제라는 모티프는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 최종 대본에서도 볼 수 있다. 거기에는 연출상의 주의점으로 다음과같이 씌어 있다. "모든 방향에서 민중들이 무대로올라온다. 그 중에는 많은 환자, 맹인, 신체장애자나 기이한 모습을 한 사람도 있다. 심청의 연꽃이 열림과 동시에 환자들은 치유된다"
하지만 뮌헨공연에서는 이 장면이 삭제되었다.
272p.
그러나 좀더 뒤에 인생의 만년에는 한국에서 살고싶어요. 한국은 내 고향이고, 언제까지나 그럴겁니다. 그리고만약 내 아이들도 한국에 있게 된다면 나는 그 땅에 묻히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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